다시 처음으로

 우리는 유토피아를 소망한다. 1516년 토마스 무어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벗어나 자연으로, 인류 본연의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자연 상태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태광의 회화는 유토피아적이다. 근대 문명에 따른 폐해가 존재하지 않는 태고의 자연이 16세기 유토피아의 가장 이상적 형태라면 조태광의 회화는 단연 유토피아다. 자연을 묘사한 따뜻하고 다정한 색채로 가득 찬 화면은 밝게 빛나고 빈곤과 기아의 부재를 대신하여 완벽한 풍요와 절대적 여유가 존재한다.

  유토피아는 미래지향적 대안인 동시에 돌아가고 싶은 과거 지향적 성격을 가진다. 이런 양면성은 스베트라나 보임(Svetlana, Boym)이 연구한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이후 동부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노스텔지어에서도 발견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부질없는 집착을 의미한 프로이트의 멜랑콜리아(Melancholia)에서부터 프레데릭 제임슨의 파스티슈(Pastiche)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던 기존의 노스텔지어 개념에서 벗어나 보임은 과거재건적(restorative)이자 과거반성적(reflective) 성격을 수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근래의 노스텔지어는 잃어버린 과거의 문화를 추앙하고 재건하려 하는 동시에 과거의 문화가 다시 반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과거를 동경하면서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기에 노스텔지어는 유토피아의 미래의 것이되, 과거의 순수한 상태를 꿈꾸는 실현 불가능한 상태와 맥을 같이한다.
  실현되지 않은 그리고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노스텔지어는 작가의 연작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색면 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 <떠도는 숲>, 사람들이 해변에서 한가하게 피서를 즐기는 <On the Beach>. 이 모든 것이 조화롭고 완벽한, 이상화된 노스텔지어적 이미지다. 색면(color field)으로 표현된 아름답게 정리된 농장의 정경과 해변가의 피서객들은 마치 끝없이 발전할 것 같던 과거 40~50년대 미국의 풍요로운 광고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구글 어스의 기능을 이용하여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에서 벗어난 지역을 선정하는 작가의 선택과정은 더욱 이러한 비현실성을 강조한다. 실현가능할 것 같지만 과거의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즐기기엔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접근이 여의치 않은 유리된 자연, 선택된 유토피아인 것이다.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구글 어스를 이용하여 완성한 작가의 시각은 무엇을 대변하는가. 데이터를 집적하여 만드는 구글 어스의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품의 시공간은 시선에 의한 감시를 상기시킨다. 푸코의 "단 하나의 시선만으로 모든 것을 영구히 볼 수 있는 완벽한 감시 장치 판옵티콘"은 구글 어스를 통해 구현되었다. 완전히 공개적인 동시에 계산된 시각으로 완벽히 은밀하게 작동하는 장치의 속성은 지구의 모든 장소를 비추되, 그 작동 형태를 물리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구글 어스와 동일하다. <on the beach>에서 면밀하게 묘사된 해변가의 여행객은 누군가 훔쳐보고 있는 듯한 불쾌감이자 그들을 엿보는 쾌감을 양가적으로 불러온다. 대상의 정체를 검은 점으로만 표현하는 구글 어스의 정책은 개개인을 보호하는 것 마냥 느껴지지만 관음증적이며 통제하기 위한 시각은 아이러니하게 우리의 숨통을 옥죄어 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작가는 숨겨진 무언가를 실체가 있는 대상으로 치밀하게 묘사하여 우리 주변을 휘감고 있는 숨겨진 감시자의 역할을 폭로한다.
  깔끔하게 구획으로 나뉘어 성장하는 자연 역시 작가에 의해 변성된 유토피아임을 알리는 단서이다. 인간의 계획과 조정에 의해 제어되는 플랜테이션 농장은 원초적 생명력의 자연과 정반대되는, 유린된 자연과 인공적 질서를 대표한다. 이제 숲은 <눈물이 되어> 공포스러운 생산력 수탈아래 놓이게 되고 인간에게 완전히 정복된 공간은 지루한 색면으로 변모한다. 따뜻하게 빛나던 <떠도는 숲>의 여유로움은 기계적으로 배치된 상품을 보듯 평면적으로 구획된 격자무늬로 돌변한다.
  화면을 유영하는 구름을 통해, 고정되지 않고 부유하는 나무를 이용하여 작가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화면을 유토피아로 되돌아가도록 다시금 유도한다. 비현실적인 소도구들을 이용하여 화면의 현실과 거짓을 교묘히 뒤섞어 관객들을 뒤흔든다. 여기서 그는 작품을 통해 감시자와 개입자를 넘나들며 중재자로 기능한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평평한 구글 어스의 부조리한 시공간 탐험을 폭로하며 완벽한 통제를 목표로 하는 도시의 유토피아이자 인간의 디스토피아는 이렇게 완성된다.

 홍진의 세계를 벗어나 표표히 살고자 하는 것은 동서양 모두 마찬가지이다. 현재가 불만족스러울 때마다 사람들은 사회의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꿈꾸나 이를 구체화하거나 현실화하지 못했다. (실상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믿었던 것은 혁명을 통한 체재 전복을 꿈꾸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던가.) 조태광 역시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접점에서 불만을 토로한다. 우리의 현실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그러나 그 경계는 불분명하고 작가는 답을 내리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에 현실적 개입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고 그의 작업 역시 유토피아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관음증적인 시선을 통해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의식 무의식을 넘나드는 개입을 하며 전시를 마무리 짓는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중간계로.

권 정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