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n Drawing

2015년 갤러리비원은 김범중, 유재연, 하대준 3인의 드로잉전으로 시작한다.
과거의 드로잉은 회화작업의 준비 단계, 혹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을 시각적으로 실험해보는 도구로 인식되어왔고 이런 역할은 드로잉 자체의 표현 방법인 즉흥성과 순발력을 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드로잉은 작가의 순수하고 솔직한 느낌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요즘 드로잉작업은 드로잉의 장점인 수수함과 솔직함 속에 작가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개입시키는 작업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즉 개념비중이 커져가는 것이다.
이번전시는 인간의 번뇌와 생활의 본질에 대하여 탐구해온 세명의 작가들이 블랙이라는 공통분모로 자신들의 깊이 있는 관념의 세계들을 표현하는 섬세한 드로잉작업들을 보여준다.
흑연과 먹 그리고 아교와 종이라는 물성을 적절히 이용한 작가들의 남다른 기법들을 감상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범중
시그널이 소스를 떠나면서 왜곡은 시작된다. 무한의 정보량을 품고 내던져지는 순간, 끝없이 증폭될 것 같던 파장은 수많은 저항과 굴절로 변형되기 시작하고 손실되기 시작한다. 소스를 떠나 멀리 퍼지면 퍼질수록 왜곡은 거세진다. 한번 떠오르기 시작한 생각들처럼 그리고 처음 선을 그었을 때처럼 그 순간부터 끝없이 왜곡되고 증발되어 간다. 단 한번이라도 처음이 온전히 끝까지 가지 않는다. 하나의 선은 둘이 되고 다시 여러 갈래로 살을 치며 회절되기도 융합되기도 한다. 표면 위에 바스러지는 흑연가루들은 공기 중 에 떠올라 흩어지고 또다시 그 입자들의 움직임은 공간을 표면으로 내려 앉힌다. 이쪽으로 움직이던 생각들은 어느새 저쪽을 바라보고 있고 가면 갈수록 방향을 잃어간다. 분명하다고 믿었던 본래의 것들은 점점 무뎌지고 희미해지고 보다 선명하고 증폭된 음으로 울리기 전에 소멸해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래의 그것이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이고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유재연
자신에 대한 관찰은 외부적으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습득함으로, 자신의 존재와, 현재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이 아닌 인간과 사회, 다른 종(種), 지구, 드넓은 우주, 즉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까지 그 영역을 넓혀 나간다. 그리고 단순해 보이지만 알면 알수록 복잡해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 얽히고설켜 마치 세상의 균형을 유지해 나가려는 듯 보이는 무수한 공생관계들 등, 세상을 탐구하려면 한 인간의 일생이 마치 하루살이의 시간과 같이 짧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자신과 그 외의 것들을 알고자 하려는 노력과 궁금증은 변하지 않는다.

하대준
어느 섬을 온통 뒤덮은 수풀로 그 땅의 기운을 예감하듯 살을 감싸 덮은 털은 내면을 은유한다. 붓질을 통한 선이 풀이 되고 털이 되면 처음 시작하는 붓끝에서 마치는 붓끝까지는 온통 그 붓을 놀리는 자의 호흡이다. 그의 어떤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자기일치로 나오는 선이다. 하지만 그러한 선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에는 선을 대하는 것처럼 엄격해질 수 없다. 젖은 먹자국이 마르면서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 것처럼 수많은 선들이 모이면서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세필의 선묘와 발묵의 상반된 표현방법이지만 그렇게 다르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