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빛나는 타자의 얼굴


어둡고 빽빽한 숲 속에서 빛나는 두 눈은 눈동자는 없지만 앞을 응시한다. 거기에는 갑자기 비춰진 후레시 불빛에 놀란 야생 동물 같은 두려움이, 그리고 그 두려움이 야기할지 모를 공격성이 잠재한다. 그것은 복슬복슬한 털로 뒤덮여 있어 마치 동물처럼 보인다. 피모와 놀란 듯한 눈구멍 빼고는 어떤 기관도 드러나 있지 않다. 한올 한올 움직이는 듯한 털은 보호막의 역할을 넘어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낸다. 전방을 주시하고 직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을 연상시킨다면, 그것은 인간 내부에 감춰져 있는 동물성일 것이다. 동물인지 인간인지 사물인지 모호한 미지의 존재는 그것이 서식하고 있는 숲처럼 미분화된 털 뭉치이며, 숲과 비슷한 재질과 색상으로 완벽한 보호색을 갖추고 있다. 놀란 눈빛만이 배경으로부터 그것을 구별시키며, 이러한 차이는 그것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꺼내서 보면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인형처럼 생긴 그것은 구체적인 표정은 없지만 경악할만한 사건에 대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사건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건들에 대면해 있는 존재의 모습을 통해 사건은 암시된다. 사건은 존재를 유아나 동물로 위축시켰으며, 자신이 비롯된 자연에 몸을 숨기게 했다. 임지현의 ‘사각의 숲’ 전은 화이트 큐브에 걸리는 사각형 캔버스에 그려진 숲이면서 ‘사각’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를 가리킨다. 가령 ‘사각지대’라는 말은 촘촘하게 드리워진 문명의 그물망을 피해가는 어떤 영역을 의미하며, 문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사각지대는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문명이 아무리 타락했다 해도 인간이 다시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만큼, 원시 또는 야성의 존재태는 한계까지 떠밀려간 문명의 타자를 예시한다. ‘검은 숲’ 시리즈가 어두운 세상에 대한 은유였음을 생각할 때, ‘사각의 숲’ 역시 어둡고 막막한 분위기다. 특히 시대의 암흑과 개인의 그것이 중첩되는 시기에 어둠은 더욱 짙어진다. 임지현의 요즘 작업은 온통 블랙이다.

전시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사각의 숲 blind spot forest](2015)에는 숲 한가운데의 빈터 가장자리에 무언가를 보고 놀란 것이 서있다. 바닥은 푹신푹신한 수풀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밑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같다. 아니면 궁지에 처한 개체가 다른 차원으로 탈주할 수 있는 구멍일까. 한편 어슷어슷 교차된 나무의 배열을 보면, 숲은 마치 새의 둥지 같기도 하다. 가장 아늑해야 할 곳이 뻥 뚫린 것이다. 그것은 현대예술의 주요 키워드가 된 ‘기괴함’이 가장 익숙한 곳--가령 집 같은--에서 발생한다는 프로이트의 가설을 떠올린다. 구멍 혹은 빈 바닥은 임박한 위험이자 상존하는 공허를 연상시킨다. 작품 [Black Forest](2015)는 숲이 덩어리처럼 배열되어 있고, 그 안에서 떨어져 있는 두 존재의 빈 눈구멍이 빛난다. 하나는 허공을 다른 하나는 관객을 응시한다. 하나의 테두리 안에 있지만 개체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듯 각자의 두려움에 잠겨있다. 공동으로 닥친 위험만이 원자처럼 흩어져 있는 개체들에게 공동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작품 [Black Forest](2015)는 식목일 날 막 심은 듯한 듬성듬성한 숲이다. 존재가 은신하기에 빈약한 환경은 누군가의 시야에 포착됨으로서 그에게 닥친 위험을 암시한다. 빈약한 가지에 매달려 위로 온통 곤두선 작은 잎들은 배후 존재의 심리적 육체적 상태를 지진계처럼 전달한다. 작품 [어이상실 Absurd](2015)에서, 숲에 숨어있던 것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를 온통 감싸고 있는 섬세하게 휘몰아치는 선들은 보는 이에 따라 무수히 달라질 수 있는 감정 상태를 표출하는 형태(게슈탈트)이다. 털끝 하나하나의 움직임은 눈 코 입이라는 기관만큼이나 표정을 만든다. 그것들은 매 순간 달리 배열되는 듯하다. 털로 보일 수 있는 같은 단위체의 반복이 정지된 그림 속에서 움직임의 환영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애니메이션의 원리이기도 하다. 작품 [Trying to see](2015)는 몸체까지 다 드러낸다.

그것은 털 한 오라기도 감출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다. 명백한 가시성의 장(場)에 적나라하게 놓여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장 해제되었음을 말한다. 사지가 생략된 상태는 포박을, 무성의 상태는 거세를 연상시킨다. 털 뭉치 인간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상대를 응시한다. 작품 [어이상실]과 함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건사고의 장면들을 암시한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담한 사건이지만 눈을 감아서도 안 되는 그 현실적 상황 말이다. 실루엣을 부드럽게 또는 거칠게 해주는 털의 이미지는 드로잉을 바탕으로 하는 임지현의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털의 이미지는 모노톤이지만 명암과 질감의 단계를 무한히 펼칠 수 있는 방식이자, 현대인 특유의 강박과 두려움을 표현하는 소재로 다가온다. 가령 이전의 유화 작품 [songes, mensonges](2007)를 보면, 온 머리를 감싸고 있는 머리털이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게 자라나는 머리털은 인간만의 특징이다.

털은 몸속에서 나와 온몸을 뒤덮으며, 어느 순간 다시 그것이 나왔던 구멍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작품 [Arachne](2008)에서 화면 한가운데 뚫린 깊은 심연이 두려움을 야기한다. 그러나 금기의 영역인 심연은 두려움과 함께 매혹도 발산한다. 인류의 상상력에서 긴 머리칼과 출렁이는 물의 이미지는 죽음으로 이끄는 매혹을 상징해왔다. 선들은 의도 및 목적과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뻗어나가 자율적인 실체를 형성한다. 작품 [tra-la-la](2009)는 털(선)이 하나의 색조로 얼마만큼의 다양한 계열로 펼쳐(접혀)질 수 있는지 실험한다. 작품 [swim](2015)에서 심연 속으로 헤엄치는 이는 무의식의 한 가운데로 힘껏 나아간다. 이러한 심리적 상황은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임지현의 작품은 심리극의 무대인 것이다. 작품 [play](2015)에서 액자 또는 무대 같은 사각형 안에서 유령 같은 존재들이 바글거린다. 마치 무성 생식 하듯, 볼링공이 쓰러지듯, 한 개체가 움직이는 궤적이 드러난 듯 수수께끼의 존재들은 사각형틀이라는 무대 위에서만 활개 친다. 작품 [theater](2010)에서 사각형의 무대 구석이나 바닥에 쓰러진 하얀 유령 같은 존재는 방사형 생물체에게 에워싸여 있다. 마치 어두운 무대를 밝혀주는 조명들이 살아있는 괴물로 변신한 듯하다.

임지현의 작품에서 심리극의 무대가 기괴함으로 가득 차 있다면, 작품의 또 다른 축인 책의 이미지는 무대 장치 만큼이나 든든하다. 임지현은 책을 충만하고 완전한 형태로 생각한다. 그것은 종잇장같은 추상적이고 창백한 유령의 단계가 아니라, 실체감을 가진다. 조각이나 오브제처럼 제시되는 책들은 3차원 상에서 그림처럼 무채색의 다양한 계조를 펼치는 수단이다. 이전의 작품 [unfinished text](2014)를 보면 다양한 명암과 질감으로 구현된 끝없이 연결된 책장이 펼쳐(접혀)져 있다. 명암의 계열에 따라 나란히 쌓여있는 책은 선들이 쌓여 만들어진 드로잉(그림)과 같은 방식이다. 그림과 책이 함께 할 때 책은 사각의 받침대나 무대가 된다. 책과 그림이 함께 하는 작품은 유년기를 가득 채웠지만 억압하고 있었던 만화적 요소, 한국에서 전공한 판화와 시각 디자인, 그리고 유학가서 배운 조각과 회화 등의 경력이 한데 녹아있다. 무대의 주인공으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털복숭이는 몽달귀신, 하얀 유령, 눈사람 등 만화적 캐릭터를 떠올린다.

유년시절 본격적인 예술작품을 접하기 이전에 몰입했던 만화의 세계는 누군가에는 모태언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인이 되면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지며 특별한 상황에서만 의식의 감시를 풀고 수면 위로 떠오른다. 가령 꿈이 그렇다. 억압된 것이 회귀되는 장인 예술은 꿈과 유사하다. 물론 이러한 억압은 요즘 같이 대중문화 전반이 유치증에 빠져있는 키덜트의 시대와는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이처럼 무조건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하는 동글동글한 캐릭터는 그렇지 못한 상황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수많은 아이들이 수몰된 사건, 그리고 더 가까이는 얼마 전 해변에 떠밀려온 난민 아이의 사진은 어떠한 참혹한 장면보다도 전쟁과 폭력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일깨울 수 있었다. 존재를 가득 덮고 있는 털처럼 보이는 선은 쭈뼛하게 솟은 소름부터 휘몰아치는 분노까지 다양한 계열의 감정을 표현한다. 털은 두려움을 포함한 욕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에 문명에서는 감춰지곤 한다. 가령 남성은 깔끔하게 머리를 자르거나 면도를 해야 하고 여성의 다리나 겨드랑이 역시 털이 보여서는 안 된다. 더 이전 시기로 거슬러 가면, 머리털마저도 가려지곤 한다.

털은 억제되어야 할 욕망으로 간주되어 때로 죽음, 또는 죽음에까지 뻗쳐있는 열락을 상징한다. 임지현의 작품 속 캐릭터는 다양한 연극적 상황 속에 배치되면서 털에 관련된 무의식과 금기를 일깨우고,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털 만큼이나 눈에 띄는 요소는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 두 개의 눈구멍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도 있듯이, 얼굴에서 눈은 큰 부분을 차지하며 시각은 모든 감각 중에서 최고로 간주된다. 니콜 아브릴은 [얼굴의 역사]에서 프랑스어는 얼굴에서 시각을 최우선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얼굴(visage)’이라는 단어는 ‘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파생했다.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는 인간에게 보는 것은 상호성을 의미한다. 얼굴은 내가 타인에게서 보는 것이고 타인이 나에게서 보는 것이다. [얼굴의 역사]에 의하면, 얼굴은 겉으로 떳떳이 드러내는 것이며 감추고 싶은 비밀이기도 하다. 내가 세상에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내 가면이다. 또한 내 깃발이면서 내 고통이기도 하다.

임지현의 작품 속 퀭하지만 크게 뜬 것이 분명한 그 눈구멍, 그 두려움에 가득한 응시는 마주 본 대상이 어떨지 암시한다. 그렇게 인식된 ‘얼굴’에는 인간적인 것이 없다. 그것이 나날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고 반복되는 폭력의 원인이 아닐까. 임지현의 작품에 분명한 응시라는 시선의 역학은 권력을 암시한다. ‘타인의 얼굴을 완벽하게 꿰뚫어보는 사람이 지배적인 위치에’(니콜 아브릴) 있는 것이다. 마치 눈(目)싸움이라도 하듯이 관객은 그것을 보고, 그것도 관객을 본다. 임지현의 작품에서 귀여운 털 인형같이 보호본능조차 일으키는 익명의 존재는 두려움과 공격성, 그리고 최선의 방어가 바로 공격임을 보여준다. 모두가 경쟁자로 간주되는 극단의 시대에 공격적인 눈초리는 유리한 점이 있다. 사회 생물학자 데이먼드 모리스는 [바디 워칭]에서 짙은 아이라인부터 선글라스까지 인간이 눈을 두드러지게 했던 다양한 방법을 소개한 바 있다. 하얀 동그라미로 나타나는 털이 안 난 부위는 눈구멍을 채우는 텅 빈 시선이자, 역설적으로 눈을 강조한다.

로드 킬 당하기 직전에 몰린 야생동물의 눈빛을 상기시키는 눈은 상대편으로부터 받은 공격적인 빛을 되 반사한다. 그것은 프란세트 팍토가 [미인]에서 말하듯이, 자기 자신이 보는 행위의 주체이면서도 그 시선에 지배받는 주체--즉 대상--로만 연출되는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타자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유령 같은 존재의 텅 빈 시선은 자신을 경악시킨 상황이 비춰지지 않는다. 경악할 만한 사태에 대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공포의 대상처럼 ‘무에 대한 환각이며, 무를 반복하는 은유’(크리스테바)이다. 무, 대상의 모호함, 재현 불가능성은 불안을 야기한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타자에 대한 적절한 재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타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 자리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환상적이다. 환상은 현존을 부재로 대체시킴으로서 비의미화의 영역, 즉 죽음을 끌어들인다. 기괴한 것은 문화적 연속성을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충동을 표현한다.

공포의 대상은 적당한 재현물을 가질 수 없으며, 그래서 더 위협적이다. 그것은 이름과 형태가 없는 어떤 것이며, 그렇기에 쉽게 추방되지도 않는다. 형태와 형식, 이름이 없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공포이다. 작품 [play]에 나타나듯이, 작가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공포인 불안에 대해 텅 빈 시선 뿐 아니라 분열, 또는 다중자아로 반응한다. 프로이트는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에서, 불안은 애매모호하고 대상이 없다고 말한다. 불안은 상처를 주는 위험에 대한 반응이다. 임지현의 작품에서 수없이 중첩되는 선들은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외상을 반복하는 불안의 심리기제를 실행한다. 불특정한 다수의 유령과 대면하고 있는 또 다른 유령이라는 사태는 근대 시기에 상상되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홉스)의 현대판이다. 임지현의 유령같은 형상들은 확실한 대상이 없는 막연한 불안의 만연을, 그리고 그 속에서 위기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는 존재를 대면시킨다. .


이선영(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