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은 形의 불꽃
최흥철(아르코 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시적 질서의 엄격함보다는 자유로운 에세이 형식의 문학적 구조를 연상케 하는 이정은의 추상적 회화는 실제로 자연의 모방과는 현격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자연과 현상에 대한 순간적인 경관과 그 은유를 떠올리게 한다.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의 <해저 2만리> 처럼 잠수함을 타고 느슨한 음악의 운율 속에서 무중력의 세계에 떠있는 남양의 해저 생물들을 작은 전망창 밖으로 내다보는 경관이 투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상 이상의 기이한 여행을 시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보다는 텍스트 기반의 추상적 기술법이 모호한 이미지를 더욱 더 모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싸이 톰블리(Cy Tombly, 1928~)는 낯선 장소로 여행하며 그곳을 생각하고 거기에 더해 의미 불명의 서투른 낙서로 끄적거린다. 그는 글을 끄적거리듯이 자동기술법의 낙서 같은 형태를 사용하여 여러 매체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함으로써 시각 인식의 억압을 해방하고 우리에게 색다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였다. 이정은의 회화 작업 역시 재현을 포기하는 대신 때로는 평온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때로는 태양의 홍염처럼 폭발할 것 같은 강렬함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플라톤(Platon, B.C.427∼347)은 독립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미와 예술 이론을 비로소 하나의 상호 연관된 체계로 결합시켰다. 그는 자신의 예술 이론이 가장 명료하고 성숙한 형태로 표현되었던 시기에 이르러서 그리스의 고전기의 미의식을 지배하던 ‘예술은 인간과 자연의 모방’론을 극복하고 모방적 예술 행위를 철저하게 거부할 수 있기를 바랬다. 예술의 발전 이론을 믿었던 거의 최초의 미술사가 빙켈만(Joha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은 일찍이 미메시스(Mimesis)를 넘어서는 이념 안에 기초를 두는 예술의 새로운 개념을 밝혔다. 그는 유기적인 전체로서의 예술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의 독자적인 길을 열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천재적 인물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에 따르면, 색은 ‘자연이 자신의 법칙에 따라 인간에게 제시되는 형태’이다.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 이후 실용적인 차원에서 회화의 채색에 있어서의 규칙과 법칙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그는 약 1790년부터 20년 동안의 집중적인 연구를 토대로 <색채론>(1810)을 저술하였으며 서로 하모니를 이루는 색의 둥근 고리, 즉 오늘날의 색상환의 개념을 만들어서 이것의 미학적 이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에게 색채론은 작품과 삶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당대의 지배적인 이론이었던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의 광학 이론과 달리 색채 현상을 밝음과 어둠 경계 사이의 양극적 대립 현상으로 보는 그의 생리적 색채론은 이것을 통해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와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뉴턴에 이르는 기계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궁극적으로 초래할 미래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다.

      오늘날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며 버젓이 벌이고 있는 4대강을 비롯한 무분별한 자연 개발이 그러하듯이 자연에 효율성과 기계론적인 해석을 가하는 것을 우려한 그의 색 이론은, 색의 정신성에 대한 직관을 담고 있으므로 화가나 일부 예술가들에게 환영 받은 것을 빼고는 당대의 이성우월주의자들에게 극렬한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오히려 예술가들이 색의 자발적인 힘을 믿게끔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또한 자연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로써 오늘날에는 생태주의자들에게 환영 받고 있다. 특히 색의 본질을 빛으로 받아들이던 시대의 화가인 모네(Claude Monet, 1840-1926)와 세잔느(Paul Cézanne, 1839-1909),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혹은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도 그렇듯이 특히 괴테의 직관을 연상케 하는 색 사용의 습관들이 쉽게 발견된다.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화가 세잔느는 생생한 이데아이자 순수 이성으로서의 색과 자연의 형태가 숨기고 있는 원형인 면의 구축적인 구성을 통해 새로운 형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이는 자신 외부에 존재하는 가시성의 가치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내재적인 관계성을 통해 새로운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모방과는 전혀 다른 화면 그 자체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정은 회화의 색의 면은 재현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조형 언어로서 구조 없는 형태요, 인접 영역과 구분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의 경계이며 관문이다. 그러므로 색의 형태는 ‘우리의 두뇌와 우주가 만나는 공간’이다.

      색은 빛으로부터 기원한다는 믿음은 아주 오래 되었고, 물론 뉴턴과 같은 고전 물리학자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괴테의 몇 세대 아래 제자이자 인지학의 창시자 슈타이너(Rudolf Steiner, 1861-1925)는 색은 각각 빛으로서, 또는 이미지로서의 그것이 분리되어야 함에도 이전의 화가들이 그렇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이정은의 색은 화면의 대부분을 덥고 있는 주된 대상이 되면서 다른 색들과의 번지는 합쳐지는 경계를 통해 독특한 형상이 된다. 그녀는 외부의 빛과 망막을 연결시키는 인과관계를 깨고 자연으로부터 색을 독립시켰다는 점에서 고전주의 예술에 대항하는 낭만주의 화가들의 입장에 보다 더 가깝다.

      비록 이번 전시 작품의 색조 중 다수는 차가운 계열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조와 대비되는 청색조이기 때문에 공간 속에서 색의 대립이 아닌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나머지 다른 색조 계열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색이 화면 전체를 덮고 있지는 않으며 서로를 보완시켜주는 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2차원적 형상은 프로시니움의 겹겹 무대장치가 그러하듯이 화면 깊숙한 내부로 밀려들어가는 원근의 공간감을 창출하고 있다. 하지만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석양이나 모네의 <수련>처럼 이것들은 그저 화면의 색이라기 보다는 게슈탈트적 처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색은 모든 물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꽃’이라는 플라톤의 언급을 빌려온다면, 이정은의 빛이 모두 빨려 들어가버린 심해처럼 푸르거나, 혹은 엷은 꽃가루로 덮힌 노랑, 아니면 말라가는 붉은 단풍처럼 가라앉은 빨강의 면들은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한 불꽃들이 서로 엉키며 무수한 신호를 맹렬히 타전하는 이미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투명한 점액질이 굳어진 프레스코 기법의 견고한 표면은 안료를 잘 빨아드려서 보다 선명하고 예리한 외곽을 만들게 되지만 그녀의 작품 속 형태들은 가장자리들이 부드럽고 미묘하게 살짝 퍼진다. 이곳은 자유로운 무중력의 바다이며 위에 보다 또렷한 색의 자유로운 점과 선들로 이루어진 형상들이 수중을 유유히 유영하고 있다. 뇌의 감각과 상상의 영역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조형의 인공성을 벗어난 형태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선에서 출발해서 서서히 성장하며 형상으로 떠오른다.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점차 의미가 불분명한 그림 문자 또는 기하학적 기호의 형태로 나아가고, 서로의 인력으로 얽히고 결합하여 유전자처럼 생명의 형상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때로는 꽃처럼 피어난다. 자연의 생명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하지만 그 힘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통찰력과 직관력을 통해 대두된다. 단지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하기나 분석하기가 어렵지만 일상적으로 반복을 거듭해서 나오는 삶의 에너지 같은 것의 분출일 것이다.

      이 작가처럼 과거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음악에 비견될 만한 순수한 시각적 언어인 색, 선, 형태 자체가 가질 수 있는 상상적 표현성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고 애를 써 왔다. 하지만 그 추상의 지경에 도달한 작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내면의 표출을 주안점으로 하는 추상의 이념이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인 제작에서도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교사 칸딘스키(Vasily Vasilyevich Kandinsky, 1866-1944)에 의하여 기초가 닦여진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추상 미술 작품 제작의 기반을 제공하게 되는 조형이론을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를 통해 설파하였다. 그는 무미건조하게 되기 쉬운 조형의 기본적인 사고에 직관과 상상의 비합리적인 내용을 더하였다.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벽화공방을 지도하였다. 우연히도 이정은의 동경예대 시절 전공은 바로 벽화이다.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들을 발표하는 이정은의 전시가 막이 오를 쯤이면 서울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돌아온다. 잘 모르는 것을 이해하고 더 잘하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그러다 보면 앞에서 언급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궁극적으로 자연에 감춰진 원형의 비밀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작가의 작업은 그녀의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절대적이고 치명적인 예측 불가능한 모든 것들의 근원에 관한 호기심의 추적이며, 그 생명 본체로부터 파생된 우연한 여행자인 개체로서 조망하고 가늠해 보는 고백과 감동의 노래이며, 순전한 시지각의 실험이고 ‘상상을 추적하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