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치된 풍경을 바라보다

근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본능적이고 물리적인 반응을 억제하고 견고하게 축조된 비물질적 구조 속에 신체를 부합시키는 행위다. 자연의 변화와 흐름에 맞춰 진화해온 신체를 인위적으로 재편한 노력은 동시대 문명의 물적 풍요를 견인한 동력으로 기능했지만, 동시에 신체에서 발화하는 다층적인 감각들과 추상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은폐시켜버린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구현모는 감각으로 접근하는 조용한 경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작가다. 그는 사물과 풍경에 대한 관찰과 사고의 과정을 스스로 관조하는 독특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특정한 접촉들을 즐기는 구현모는 모호하고 비논리적인 사유의 질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한다. 그의 작업은 명백한 답변의 여지가 적은 모호한 질문들을 연속적으로 제기해온 것이었다. 분명한 응답의 여지를 고려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언어적 모호함의 토대 위에 서 있는 물음들을 던져왔던 것이다.
‘집’이라는 대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들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속성을 반영하는 일차적 풍경이자 환경으로서 존재하는 집의 속성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다. 집은 가장 기본적인 단위구역 내에서 확장된 자아이면서 동시에 외부로부터 그 한정된 영역을 방어하는 대상이다. 이 본질적인 중의성으로 인해 집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 물질과 비물질과 같이 항시 마주쳐야 하는 어떤 경계의 느낌을 내재하고 있다. 구현모가 집이라는 대상에 몰두해온 이유는 바로 그러한 중의성에 대한 선호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안과 밖의 경계’의 느낌을 도치시켜 새로운 풍경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번 전시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번 개인전에서 구현모는 종이와 나무를 주된 재료로 하여 축조된 세 종류의 집을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모델링과 같은 스케일의 작은 규모로 만들어진 이 집들은 신체의 스케일을 넉넉히 수용하되 풍경의 일부로 존재하는 존재성이 역전된 것들이다. 그 크기는 집으로 표현하는 어떤 풍경의 느낌을 관객이 한 눈에 조망하게 하기 위한 작가의 선택이다. 작게 축소된 집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의 집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마치 모형장난감과 같이 핸디한 오브제로 인식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즉 집에서 시작할 수 있는 사유의 과정이 왜곡되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바니쉬를 엷게 바른 종이와 같이 그가 선택한 재료와 기법은 원래의 고유한 느낌을 차단시켜 결국 작품의 물리적 특질을 약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상화의 왜곡을 고려하여 내린 작가의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전시장에 오브제로 구현한 집은 이끼집, 눈집, 번개집 등이다. 이끼집의 내부에는 녹색의 이끼가 조밀하게 들어차있다. 자연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끼라는 소재가 실내에 한정되어 펼쳐진 느낌은 마치 외부에 존재하는 초원과도 같은 풍경 한 자락이 실내로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방들을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초원의 느낌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눈높이에서 펼쳐져 있다.
눈(雪)집의 내부에는 흰 눈이 가득 깔려 있다. 이끼집이 어떤 시각적 풍경의 도치를 표현하고 있다면 눈집은 온도나 계절감과 같은 촉각적 풍경의 도치를 표현하고 있다. 작은 집의 안쪽에 쌓여진 흰 눈의 느낌은 외부의 풍경과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전시장의 느낌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번개집의 안쪽에서는 계속해서 번개가 치고 있다. 자연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공감각적 현상이 집 안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을 끌어와 실내에 두는 구현모 작업의 기본적 토대를 설명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즉 외부에서 경험하는 번개에 대한 신체의 수동적 기억은 번개를 집 안으로 들여와 재현시킨 대상을 관조하게 되는 새로운 상황으로 인해 전혀 다른 감상의 차원으로 반전되면서 새로운 관찰의 시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세 집은 공히 관객의 시야를 고려한 높이에 배치되어 있다. 그것들은 작가가 직접 제작한 받침대 위에 올라가서 집의 스케일이 부여하는 비례에서 살며시 벗어나 있다. 그의 집들은 공히 물리적인 제약으로서의 공간이 구획되어 있고,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자연의 느낌이 기묘하게 혼재되어 있는 것들이다.
오브제의 형식으로 배치된 세 종류의 집들 외에도 함께 벽면에 배치된 드로잉들을 통해 그의 자유로운 사고의 면면을 더 잘 관찰할 수 있다. 계단으로 만들어진 집, 구름을 안고 있는 집, 숲을 끌어온 집과 같이 흥미로운 집의 이미지들은 그의 관심이 가진 연속성과 감각적 사고의 단면을 들춰보게 한다. 구현모의 간결한 드로잉 작업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오브제로 재현한 집들 또한 3차원적 형태로 구현한 드로잉에 가깝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는 모호한 정신세계의 이미지들을 절제된 형식으로 재생하겠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끝을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불가지의 영역을 수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는 완성된 사고의 결과물을 관객 앞에 내어놓겠다는 의도보다 관객의 사고가 중첩될만한 여지를 조성하고자 하는 작가적 태도가 깔려있다. 이것은 드로잉이 보유한 특질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인데, 본질적으로 과정과 결과의 미학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드로잉 미학의 특징에 잘 부합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과잉의 상태로 존재하는 이 시대에 밀도 높은 결과물을 추가함으로써 또 하나의 과잉을 초래할 필요가 있느냐고 구현모는 말한다. 고백 같기도 하고 질문 같기도 한 그의 언어는 그의 작업에 내재한 본질적인 태도를 은유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그가 만든 작은 집들이 근대화된 삶의 패턴을 거스르는 사고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은 그 작은 집들과 조우하는 시선의 토대 위에서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고원석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