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게

말은 뱉어진다. 순간의 소리는 파장이 되어 너와 나의 사이를 공명하고 음파는 코드화 되어 공진하는 대기 속을 부유한다. 비슷한 해석 체계를 공유하는 집단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이 코드들을 해석하고 정보를 교류한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존재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다고 했던가. 해석된 코드는 무의미에 의미를 덧씌운다.

우리가 만약 언어의 이중성에 관해 심각한 인지장애를 앓고 있어 “난 네가 미워 죽겠다” 혹은 “예뻐 죽겠다” 는 식의 표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미움,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혈류를 차단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어떤 물리적 힘 정도로 해석 될 것이다. 위 문장들의 표상은 곧 이어 진행 될 죽음에의 예단이며 여기서 죽음이란 그 자신과 동격이 될 대상을 지시하는 하나의 연극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비극은 최고의 가치로 여겨져 왔다. 삶이란 궁극적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버려질 수 있는 정도 만의 가치를 지닌 무엇이 되었다. 난 네가 미워 죽겠다는 표현에는 미움으로 인한 분노로 자멸할 수 밖에 없음을 선포하는 인간의 비극적 서사가 문장의 권위와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결국 비유란 비-관계적인 두 존재의 동격화 과정이다. 죽음과 아름다움이, 죽음과 미움이 동등해지는 그런 비상식적인 과정. 이것은 과장이며 동시에 포장된 외피다. 문장의 알맹이는 내피 속에 깊이 감춰져 그 투명한 피부를 드러내지 않고 이것을 해석해 내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의미의 자가증식이 이뤄진다. 미워 죽겠다고 해서 정말 죽는 사람 본 적 있는가? 결국 우리는 무의미를 영원히 재생산 하는 것이다.

이대철이 포착해낸 것은 이런 언어의 모순적 속성일지도 모른다. 혹은 폭발하듯 뱉어져 대기 중으로 코드화 되는 언어의 순간일 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기의와 기표, 표의와 함의가 공존하는 언어의 양가적 속성에의 탐구일지도, 그도 아니라면 의미화 된 무의미의 고발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엇이든 그가 포착한 순간은 언어의 속성들이며 증식하고 뱉어지는 순간 과거가 되는 찰나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언어 이전에 소리가 가지는 특질이며 동시에 그간 음향 자체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온 그의 행보를 이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사실 이대철의 작업은 예쁘다. 그의 성격대로 꼼꼼하게 정리된 조각들이 화려한 색들로 정갈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언어 조각들의 형태는 하나같이 부풀어 올라 터질 듯 하며 이미 폭발해 흩어지고 있거나 단어가 단어에 짓이겨 무너져 내리고 있다. 언어의 이중성의 조명이란 실은 언어의 가장 부정적 측면의 공론화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형형색색으로 치장된 긍정의 이면에 마냥 예쁘다고 하기엔 불편한 무엇인가가 있다. 이대철의 작업을 비가시적 순간의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그 결과로서의 형상은 결국 주관의 소산이다. 나타난 이미지는 작가 본인의 개인적 사유와 감정에 기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텍스트는 소리와 언어의 이중성에 관해 무엇인지 모를 부정적 시각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그의 작품은 불편하다.


우리는 언젠가 터키인이 운영하는 허름한 바에서 술잔을 나눈 적이 있다. 위스키로 목을 축인 후 몇 모금의 담배 연기 뒤로 그가 첫 운을 때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사랑 받는 존재임을 확인하는데 모든 것을 바쳐왔다고 말이다. 뭐 놀랍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그는 정말 그랬을 터였다. 몇 년 전 코벤트 가든 앞에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그에게 일방적인 애정을 느꼈다. 그는 상대를 그렇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모나지 않아 둥그랬고 따스해서 푸근했다. 한 귀로 흘릴 지언 정 앞에서는 그 어떤 말도 다 받아 주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다. 하루에도 열댓 번씩 좋아서 죽어버릴 것 같다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의 한 골목길에서 담배 연기를 뿜던 그의 공허한 눈빛은 나로 하여금 좋아 죽을 것 같다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좋은 사람, 사랑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 한 인간의 비극적 서사를 서슴없이 남용하는 사람이 되길 택했다. 이상하리만큼 가벼운 그의 어법을 속내를 감추기 위한 두터운 외피로 사용했다. 그런 그가 언어의 이중성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향한 질문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표면 너머엔 시간에 의해 변화하는 의미의 상대적 속성과 사회와 개인적 영역간의 대립, 동시에 수반 되어야 할 책임과 제재의 영역들이 서로 맞물려 상충하고 있다. 일종의 합의로 구조된 이 언어가 불변의 확정성을 지닐 수는 없겠지만 모순적이게도 뱉어지는 순간 확고 부동한 판결이 되어 이를 지켜내지 못한 죄인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 뱉어진 언어란 삶 전체를 요동치게 할만한 무게를 지님을 지금 그는 그 누구보다 깊이 체감하고 있다. 동시에 그 거대한 짓눌림이 누군가에겐 너무나도 가벼울 수 있다는 그 이중적 속성 앞에 다시금 진저리 치고 있다. 너무나도 불안한 서른 중반의 인생의 한 귀퉁이에서 그는 혼자 묵묵히 형벌을 감내하고 있다.

우리는 평생을 사랑하기로 맹세한 누군가의 품 속에서 참을 수 없는 권태를 느낀다. 결승선을 끊었다고 믿었을 때 축배를 들고 찾아온 허무를 맞이해야만 하며 굳건하게 믿었던 몇몇 단어들의 무상함을 태연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인생이란 휘황찬란한 파티에서 수 많은 이들에 둘러 싸인 나를 기어이 찾아내고야 마는 공허를 대면 해야만 하는 시점은 슬프게도 반드시 찾아온다. 거대한 암석의 풍화처럼 불변하리라 믿었던 존재의 침식을 눈앞에서 목도해야만 한다는 사실만큼은 절대적 불변이리라. 어째서인지 우리는 이런 불가해한 비상식들에 둘러 싸인 채 그것에 공감하며 또 유대해 살아간다. 생이란 말의 무상함과 그것이 지닌 권위의 양가적 속성을 순순히 인정하게 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언어의 문제 이전에 인간 실존의 선험적 문제들이다. 일종의 언어, 기호학적 문제가 개인의 영역에서 해석 되었을 때 이것이 좀더 포괄적인 문제로 변질 되는 것일까. 결국 이대철은 언어라는 매우 공적인 주제를 통해 실은 매우 사적인 독백을 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뭐 어쨌건 그는 지금 그 지독한 형벌의 고통 속에서 언어에의 탐구를 빌어 생의 가장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일지도.

안타깝게도 친구에 관한 글은 언제나 두서가 없다. 나는 친구된 의무로서 그 신물 나는 좋아 죽겠단 거짓말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줄 의향이 있다. 그러나 딱 한가지, 친구로서도 그를 좋아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도 바라는 것이 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그의 말처럼 그가 정말 좋아서 죽었으면 좋겠다. 장황하고 산발적인 이 글은 아마도 이 마지막 말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Woody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