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진의 회화
부유하는, 생성하는, 이행하는 의미들


  랭보는 말이 원래의 지시적 의미를 잃고, 흐르는 구름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시의 본성을 겨냥한 말이며, 시의 극단을 조준한 말이다. 시가 다만 개인적인 층위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시가 극단적인 형식에 이르렀을 때, 말하자면 시가 가장 개인적인 층위에 머물렀을 때, 그래서 시가 가장 순수해질 때, 시는 의미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 순수한 언어유희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그렇게 시는 소통을 위한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멈추고, 불통을 증언하는 것으로 열린다. 소통을 위해 언어가 필요하지만, 더 잘 더 많이 더 섬세하게 언어를 사용할수록 오히려 불통의 딜레마에 빠진다. 시의 아이러니고 언어의 역설이다. 아니, 엄밀하게는 언어가 아닌 언어용법의 패러독스다. 그렇게 내가 하는 말은 결코 너에게 가닿지도 너를 맞추지도 못한다. 언제나 어슷비슷한 의미들로 어긋나고 빗나갈 뿐. 흐르는 구름이 꼭 그렇다. 이거지 싶어 보면 어느새 저것이고 저거지 싶다가도 불현듯 이것인 게 구름의 형상이다. 구름의 형상은 말하자면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형상이다. 누가 구름의 결정적인 형상을 붙잡을 수가 있는가. 구름이 그렇고 의미가 그렇다.
  이행중인 형상과 마찬가지로 이행중인 의미에 대해선 랭보와 함께 자크 데리다의 차연과 산종이론이 의미심장하다. 하나의 의미란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계속 미끄러질 뿐 궁극적인 의미, 최종적인 의미, 결정적인 의미, 바로 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다.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은 마치 의미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와도 같고, 다른 의미들을 불러들이는 의미들의 끝도 없는 연쇄와도 같다. 랭보와 데리다가 시와 언어의 현상적(어쩌면 한계적)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면, 질 들뢰즈의 00되기는 언어를 이행중인 언어로 사용하는 언어용법에 대해서, 언어를 실천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증언해주고 있다. 언어를 그리고 의미를 고정하고 결정화하려는 제도의 기획(어쩜 관성)에 대해서 언어 고유의 다의성(어쩌면 탈언어적인 성질과 함께 그 자체 시의 본성이기도 한)을 구제해내려는 실천이며 방법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에 있다. 안 봐도 비디오인 결정적인 의미, 고정적인 의미체계를 흔들어 어떻게 언어며 의미의 다의성을 회복할 것인가, 에 있다. 최수진의 그림은 이런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고, 그래서 의미가 있다.

  최수진은 그림의 주제를 <알레고리의 숲-불안의 노래>(2011년 개인전)며, <호기심, 구름, 단어>(2010년 개인전)로 명명한다. 알다시피 상징과 알레고리는 이차적인 언어다. 차이가 있다면, 상징의 지시적 의미가 어느 정도 결정적이라면, 그래서 그 의미를 공유할 수 있다면, 알레고리의 지시적 의미는 상대적으로 비결정적이고 열려있다. 상징들이 모여 하나의 혹은 복수의 서사를 파생시키는 이야기의 기술로, 의미가 의미를 불러들여 밑도 끝도 없는 의미들의 연쇄를 파생시키는 의미의 기술로 알레고리를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이런 알레고리가 숲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알레고리의 숲이란 실재하는 숲을 의미하기보다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서사며 의미들의 연쇄가 발생하고 파생되는 장을 의미하고, 어쩌면 하이퍼텍스트와도 같은 상황논리의 제안 내지는 마치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에서처럼 작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 숲이 불안의 노래를 부른다. 아님 내뱉는다. 왜 불안인가. 여기서 불안은 무슨 의미인가. 말과 말들이 그 지시적 의미를 잃고 부유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의미와 의미들이 정박하지 못한 채 뜬구름처럼 흐르기 때문에 불안하다. 그러므로 그 불안은 실존적 의미로서보다는 이행하는 의미들이며 파생되는 서사들에 연유한 언어유희의 한 성질내지는 이에 대한 반응에 가깝다.
  그렇다고 그 불안에 실존적 의미가 없지는 않다. 유년시절에 작가는 꽤 오랫동안 천식을 앓았다. 천식은 알다시피 숨을 잘 못 쉬는 증상이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증상이 작가의 그림에 남다른 징후를 불러들이는 계기가 됐다. 온통 숨에 민감한 탓에 세상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점차 천식에서 회복되면서(거의 사춘기 즈음에 이르러서) 비로소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보아지고 들리는 세상은 마치 처음으로 보고 듣는 듯 했다. 세상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귀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현상학적 에포케며 의식의 영도지점을 저절로 선취한 경우로 봐도 되겠다. 그래서 호기심이고 구름이고 단어다. 세상을 온통 처음 보는 것 같았고, 이미 정박된 의미며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적어도 작가에게 정박된 의미가 같은 건 없었으므로), 마치 흐르는 구름처럼 의미며 단어들을 흐르게 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엔 유독 공기와 안개와 구름 같은 허물 허물한 것들이 많고, 숨을 지시하거나 암시하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공기텐트, 안개그물침대, 안개 탕, 구름더미의 숲, 구름철망, 공기돌탑, 공기대화, 야간먼지집회, 먼지괴물, 먼지부엉이와 같은. 그림에서 공기와 안개와 구름은 사물과 현상의 고정된 의미를 흔들어 흐르게 하고, 그 경계를 허물어 서로 침투 내지 침윤되게 하고, 이로써 의미세계를 재편하게 한다. 이를테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버섯이 혀를 내밀어 옆에 있는 다른 버섯의 머리를 핥는 것과 같은. 만화적인, 공상적인, 초현실적인, 자동 기술적이고 자유연상적인, 하이퍼텍스트적인, 마치 농담과도 같은 상상력으로 의미로 구조화된 세계를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엔 대전과학엑스포의 마스코트 꿈돌이가, 작가가 세계를 여행하면서 얻게 된 각종 민속인형들이, 성모 마리아 내지는 불두 내지는 뱀을 호리는 여인과 같은 성상 이미지가, 미니어처 목마가, 알만한 혹은 알 수 없는 아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견장과 같은 추상적 기호가, 만화와 같은 말풍선이, 유기적인 붓질과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기호가, 형상과 추상이 그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공존하는 아님 상호 스며들고 침투되는 친근하면서 의외의 어떤 차원이 열린다. 알만한 모티브들이 그림을 친근하게 한다면, 그 알만한 모티브들을 배열하고 배치하는 방식이 의외의 비전을 열어 놓는다.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의미들이며 파생되는 의미들로 의미세계를 재부팅한다고나 할까.
  여기에 일종의 이중그림 내지는 다중그림이 더해진다. 소설로 치자면 액자소설에 해당하겠다. 이를테면 구름이 흐르고 철망이 있는, 그 위에 이러저런 모티브들이 얹혀 있는 보통의 숲 그림이 겉 그림이라고 한다면, 나무의 옹이처럼 아님 혹처럼 표면으로 돌출돼 보이는 사람 얼굴이, 넓적한 돌 위에 펼쳐진, 미니어처 집을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풍경이, 그리고 여기에 용을 퇴치하고 공주를 구출하는 신화 속 테마를 변주한 정경이 속 그림에 해당한다. 큰 그림 속에 마치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작은 그림들이 중첩된,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들어있는,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들이는, 하나의 이야기에 내포된 결정적인 의미를 비결정적으로 열어놓는,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이야기들을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으로 만들어놓는, 그렇게 이야기들 스스로 의미를 파생시키는,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들의 연쇄가 전개된다. 마치 이야기가 멈춘 순간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천일야화에서도 같은, 아님 생각이 생각을 물고 기억과 현실인식의 경계가 넘나들어지는 의식의 흐름에서와도 같은 상황논리며 논리의 비약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최수진의 그림에서 숨은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결정적이다. 작가의 숨을 못 쉬는 경험은 숨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감적인 이해와 서술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테면 내 체온을 거쳐나간 공기가 외부의 공기를 가로지르며 공중에 뜨는 것을 감지할 정도로. 숨이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이 거의 감지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일이고, 그런 만큼 작가만의 남다른 아이덴티티며 멘탈리티를 형성시켜준 계기이며 사건으로 봐도 되겠다. 살아가다 보면 숨 막히는 현실에 직면할 때가 있다. 그때 사람들은 모처럼 숨의 실체를 또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작가는 그렇게 숨의 실체가 또렷해지는 순간을 그리고, 그 순간의 몰입을 그린다. 문제는 이처럼 또렷해진 숨 속에 모든 것들이 녹아든다는 것이다. 숲도, 나무도, 하늘도, 사람도, 원래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모든 것들이 숨 속에 녹아들면서 흐물흐물해지고 경계가 지워져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화해진다. 마치 존재며 세계 전체가 희부옇게 흔들리는 한갓 공기소(素)로 변질된다고나 할까. 작가는 그런 아니마(영기)로 충만한 세계를 그리고, 불안(아님 위로?)과 몽상이, 서사와 비전(아님 일루전?)이, 이야기의 기술과 의미의 기술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넘나들어지는 세계를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감각적인 현실이 재편되고 재구조화되고 재부팅되는 원형적이고 원초적인 세계(상상계?)를 그려놓고 있었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