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콜라주, 혹은 애니메이션 조각들

예술가들은 과연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재현’할 수 있을까? 그것도 전 지구적 차원에 펼쳐진 복잡한 네트워크에서 전자 정보라는 이름의 유령처럼 질주하고, 내빼고, 쏠리고, 흩어지는 자본의 흐름을, 그 흐름을 관장하고 그에 개입하는 의사결정 과정을, 이 모든 것들이 국가와 기업과 가계에 미치는 인과적 고리를 드러낼 수 있을까? 사회과학도 못하는 일을 예술이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잘못된 질문이다. 예술가들은 정확하고 올바른 ‘재현’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자본주의란 그들의 상상력을 꼬드기는 문제적 현상일 뿐이다. 요컨대 그들은 지적 성찰과 탐구를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적절하리라. 예술가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지적 이해조차 감각적 자극-흥분이건, 환멸이건, 슬픔이건-의 형태로 작업 과정 속에 녹여낸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리 하는가? 존 하트필드의 <금화를 집어삼키는 슈퍼맨 아돌프 히틀러>(1932)는 파시즘과 자본의 유착관계를, 리처드 해밀튼의 <오늘날의 가정을 그토록 이색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1956) 등의 작품들은 가정을 지배하는 소비문화의 지배력을 잘 ‘드러낸’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 드러냄은 재현과 무관하다. 이 두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의 작업 방식은 콜라주이다. 서로 이질적이고 무관한 이미지들을 배치하고 조합함으로써 정치와 자본과 문화의 은밀한 상관관계를 드러내기. 그런데 이 상관관계는 과학적 표상이라기보다 하나의 단순화된 픽션이다. 그것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픽션이다. 이 픽션들이 유발하는 것은 파시즘과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오히려 이 픽션들은 잘 짜인 유기적 질서로 이해되어 온 사회와 예술 모두를 향한 감각적 도발이자 풍자로 읽힌다. 관객들은 이 작품들을 접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보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들여다보고, 궁금해 하고, 웃고, 찡그리고, 뭔가 덧붙이고 싶거나 아니면 뭔가 빼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이 작품들은 존재하는 세계를 성찰하고 분석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고유의 이미지를 만들고 뒤섞음으로써 존재하는 세계를 간단하게 해체하고 유쾌하게 희롱한다.
신일용의 전시에도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과 콜라주적인 접근 방식이 발견된다. 신용카드, 달러 지폐, 달러 동전, 개미, 말벌, 파리 등의 이미지는 신일용에 따르면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이다. 신일용의 연작 작품들은 이 요소들의 다양한 배치와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콜라주와 차이가 있다면 신일용의 작업은 컴퓨터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차이는 사소한 차이가 아니다. 기존의 아날로그 콜라주가 다른 곳에서 빌려온 실사 이미지들을 재조합하는 것이라면 디지털 콜라주는 이미지들을 창조(가공)하여 조합한다. 신일용의 작업에서 주요한 구성요소인 곤충 이미지들의 눈과 털들은 마치 극사실주의적인 재현인 양 나타난다(지폐와 동전도 마찬가지다). 또한 신일용의 작업은 평면작업이지만 아날로그 콜라주와 달리 3차원의 환영 효과를 주고 있다. 이 구성요소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구도 속에 입체적으로, 그리고 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신일용의 3D 콜라주는 이질적인 것들의 재조합이라기보다는 이질적인 것들이 등장하여 상호작용하는 것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신일용의 연작은 마치 3D 애니메이션의 몇몇 장면을 캡처하여 보여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요컨대 신일용의 연작에서 신용카드는 극장이 되고 화폐는 무대가 되고 곤충들은 캐릭터가 된다. 그것들이 구성하는 픽션은 물론 자본주의에 관한 픽션이다. 인간들을 욕망이라는 동인과 경쟁이라는 동학에 예속시키고 그들의 존재를 동물적 지위로 전락시키는 시스템, 항상 누군가는 군림하고 누군가는 착취당하는 불평등한 시스템에 대한 픽션이다. 그런데 이는 과거의 콜라주 작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나치게 단순한 픽션이다. 또한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고전적인 픽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픽션이 얼마나 정교하고 신선하냐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픽션이 하나의 사물로, 역동적이고, 세밀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로 관객에게 제시된다는 점이다. 특히 신일용은 이 연작들을 모서리가 금빛으로 도색된 알루미늄 판 위의 이미지들로 전시한다. 이로써 그의 작품은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소유 가능한 스펙터클한 사물이 된다. 그것들은 시각적인 쾌락뿐만 아니라 소유의 욕망을 부추기는 사물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신일용의 작품들이 하나하나 독립적인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연작으로 전시될 때는 마치 애니메이션의 조각들, 혹은 애니메이션이 상연되는 공간의 조각들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관객들은 그들이 모르는 어떤 극장에서 상연된 애니메이션의 일부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전시에 걸리지 않은 다른 작품들은 어딘가에 은닉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하게 된다. 나는 신일용의 디지털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은 그것이 소유 불가능한 것을 소유 가능한 것으로 분할하고 사물화한 (것 같은 환상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본다. 그것들은 전체의 일부 이미지-작품-공간-조각으로 관객의 눈앞에 나타난다. 그것들은 일부를 드러내고 일부를 감추는 것 같은 방식으로, 충족 가능한 욕망과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동시에 부추긴다.
신일용의 연작들은 작품 하나하나를 보고 느끼는 방식으로 감상하고 또한 구매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방식도 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존재하지 않으나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사물들, 수집할 수 없으나 수집하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사물들과의 연관 속에서 감상하고 구매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의 시스템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동물의 욕망을 ‘드러낸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작품-상품은 과거에서 미래로, 컴퓨터 안에서 컴퓨터 밖으로, 전시 공간 안에서 전시 공간 밖으로 무한히 펼쳐진 데이터베이스의 일부가 매혹적으로 현현한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언젠가 그 데이터베이스에서 또 다른 작품-상품이 등장하리라는 기대. 우리는 이렇게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과 콜라주를 상상적으로, 동시에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신일용의 연작들 안에서 몰려다니고 싸우는 곤충들을 본다. 특히 그들의 눈, 무수한 눈으로 이루어진 겹눈을 본다. 그들은 세상을 어떻게 볼까? 아마도 무수한 조각들의 콜라주로 보지 않을까? 인간과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충족될 수 없는 욕망, 영원한 허기 따위는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저주 받은 인간은 존재하지만, 저주 받은 곤충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시인, 사회학자 심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