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의 알레고리  Allegory of Self-torment
신지웅 / art advisor

수박이란 매우 이상한 과일이다. 과일 중에서는 가장 크다. 껍질도 상당히 두껍다. 그런데 그 사이즈와 딱딱한 껍질에 비해서는 매우 연약하다. 약간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깨어지기 일쑤다. 일단 깨어지면 보기가 매우 처참하다. 진한 초록 껍질 속에 숨어 있는 붉은 속살과 그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검은 씨가 흥건한 과즙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나뒹구는 모습을 볼 때는 마치 교통사고 현장에서 뭉개진 사람을 보는 것처럼 섬뜩하고 혐오스럽다.
한 여름 밤, 잘 익은 수박을 자르려고 수박 껍질 속에 칼을 밀어 넣으면 그 딱딱한 껍질이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쫙 갈라진다. 자르기 전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르게 마치 홍해가 모세 앞에서 갈라지듯이, 수박은 그 붉은 속을 너무나 명쾌하게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원함이 까닭 모르게 두렵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정경심이 그린 대부분의 수박은 시원하기 보다는 섬뜩했고, 청량하고 달콤하기 보다는 걸쭉하고 비렸다. 자르지 않은 수박들은 유령처럼 무중력 상태에서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고, 속이 탱탱 곪은 것 같이 보이는 삭은 것도 있으며, 거대한 여자의 가슴처럼 나를 압박하고 위협하는 것도 있고, 심지어 수박 귀신처럼 나를 넝쿨로 칭칭 동여매고 끌고 가려는 수박도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잘린 수박의 연약한 속은 검붉었다. 특히 붉은 속을 흘러내리게 그리는 부분에서는 시원하다 못해 “전설의 고향”의 한 장면에서 원한 맺힌 처녀 귀신의 입가에 흘러내린 피처럼 으스스한 것도 있다. 색은 매우 탁하여 수박의 시원한 맛은 변질된 것처럼 보이고, 그 속에 박힌 윤기 나는 검은 씨들은 마치 바퀴벌레가 모여 있는 것처럼 불결하고 불길하다. 물론 개중에는 수박 본래의 화려한 속이 한편의 화려한 산수화처럼 감각적인 그림도 있고, 바다처럼 시원하고 호방한 과일로서 수박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그림도 있지만 대체로 전시되는 수박 그림들은 음습하고 고통스럽게 보인다.
그 무엇보다도 <Making watermelon punch>라는 비디오 작품은 왜 대부분 페인팅의 소재가 수박이어야만 하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물이 채워져 있는 어항처럼 보이는 유리 컨테이너 속에 둥둥 떠 있는 수박을 작가가 칼로 자르는 퍼포먼스를 모니터를 통해 영상으로 보여준다. 희고 연약한 작가의 손이 수박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힘겹게 칼로 찌를 때 수박의 과즙이 피처럼 흘러나온다. 처음에 비교적 맑은 분홍에 가까운 선홍색의 과즙이 계속 난도질을 하자 점차 그 수박의 붉은 속과 검은 수박씨가 뒤섞여 매우 탁한 검붉은 색으로 변하고, 수박을 자르는 작가의 고된 숨소리가 급박해 질수록 컨테이너 속의 물은 더 짙은 핏빛으로 변하고 수박은 너덜너덜 해진다. 수박이 완벽하게 사람(작가)처럼 의인화(anthropomorphism)되어 보는 내내 마치 고문과 살인의 현장에 서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보는 데 힘이 든다.
정경심은 상당히 오랜 기간을 음식과 먹는 행위를 소재로 그림을 그려왔다. “코스모스 레스토랑(2009)”이라는 전시에서는 인간의 먹는 행위 속에 숨어 있는 가학성과 강박성을 표현하여 왔고 “허기를 메우며(Feeding the Void)(2010)”에서는 먹는 주체와 먹히는 대상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면서 먹는 주체의 피학적인 면모를 그려왔다. “코스모스 레스토랑”에서는 먹는 행위가 생존하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행위지만 그 행위가 문명화되면서 가장 본질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적 행위가 되었고, 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그리고 먹는 행위를 통해서 형성되는 결속의식을 확대 강화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그려왔다. 맛있게, 함께 먹는다는 문화 행위 속에서 과식도 생겨나고 거식도 생겨난다. 사랑과 은혜의 이름으로 음식을 베풀고 권하고, 또 건강이란 명목으로 음식을 제한하고 금한다.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 행위가 쾌락화되면서 욕망으로 전화되고 그 쾌락을 향한 욕망이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먹는 본능을 뒤틀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라도 가까운 사람에게 맛있는 것을 더 먹이려는 욕망과 하나라도 더 먹으려는 욕망이 뒤엉켜 가학적인 충동이 본능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욕망의 추구가 본능을 구성하는 것 같은 본말의 전도를 정경심은 먹는 주체와 먹히는 대상을 뒤바꾸어서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 사람을 통해서 먹히는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허기를 메우며”에서는 마침내 음식을 먹는 인간 스스로가 음식처럼 접시 위에 담겨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먹는 쾌락에 대한 추구가 섹스에 대한 쾌락의 알레고리로 전화되면서 쾌락의 주체가 쾌락의 대상이 되면서 생겨나는 기괴한 허기를 텅 빈 식당의 공간으로, 상한 과일로 색소나 독이 뿌려진 불량식품으로 그려냈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정경심은 먹는 쾌락과 먹히는 쾌락의 추구에 대한 욕망을 수박 속에서 통합시키고 있다. 가학과 피학을 수박 속에서 중첩시키고 통합 시키는 것이다. 즉 수박을 자학의 알레고리로 그려내는 것이다. 자학이란 근본적으로 자기가 자기에게 고통을 가하고, 또 자기가 자기에게 가한 고통을 스스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매우 도착적인 행위이다. 본래 사디스트는 자신의 가학으로 상대가 고통을 느끼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사람인 반면에, 메조키스트는 상대가 자신에게 가하는 고통 속에서 쾌락을 부여 받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디스트 상대가 메조키스트가 되면 가학의 의미가 없어져 쾌락을 느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사디스트와 메조키스트는 서로 어울릴 수가 없다. 그런데 자학은 이 어울릴 수가 없는 두 모순적 충동이 한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분열적인 도착인 것이다. 그런데 이 분열은 매우 자폐의 공간 속에서 수행된다. 이 공간이야말로 지극히 여성적인 것의 표상인데, 정경심은 이것을 수박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전 전시에서도 여성으로서의 주체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었지만 이번 전시에서 여성으로의 주체는 매우 전면화 되어서 나타난다.
사실 인간이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다. 인간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고, 그 남자와 여자를 합쳐서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물론 기록상으로는 매우 희귀하기는 하지만 양성을 동시에 지닌 인간이 존재한다고도 하지만 나는 아직 만나본 적은 없다. 남자를 남자이게끔 하는 속성을 남성성이라고 한다면 여자를 여자이게끔 하는 속성을 우리는 여성성이라고 부른다. 섹슈얼리티란 것도 따지고 보면 남성성과 여성성을 기본 축으로 하여 성립된 담론인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구성된 것을 구성하게끔 하는 것은 다분히 생물로서의 차이가 불러일으킨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 차이를 성별로 차이 짓고 구분을 한다. 따라서 여성성이라는 것은 다분히 남성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고, 남성성도 마찬가지로 여성성과의 차이 속에서 드러날 뿐이다. 서로의 차이가 불러일으킨 차이 속에서 섹슈얼리티는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여성성이 구성되는 방식은 남성성이 구성되는 방식과 다르게 구성되어 왔다.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여성성은 상징적 거세가 결여(foreclosure)되어 스스로 표상화 될 수가 없으므로 주체를 형성할 수 없는 무능의 결과인 것이고, 이리가리(Luce Irigaray)식으로 말하자면 여성의 거세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신체적이기 때문에 거세에 대한 공포는 남자 아이의 욕망을 여자 아이의 욕망으로 각인 시키는 억압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의 담론이 여자의 은유”(Gayatri Spivak)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성이 남성성이라는 대상에 비추어서 범주화되어 왔지만 남성성은 그 자체로서 인간성이라는 초월적인 범주로 구성되어 온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가부장적 사회라는 현실적 구조는 남성성 자체가 여성과 구별되는 생물로서의 차이를 뛰어 넘어서 인간성이라는 범주로 스스로를 일반화한 결과 때문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상호 대칭적인 범주가 비대칭적인 범주로 병치되면서 여성성 자체가 남성성에 의해서 규정되고 한정되면서 왜곡되어 온 것이고, 그래서 여성은 그 섹슈얼리티 자체가 억압되고 뒤틀려 버리는 것이다. 여성성 자체가 애초부터 남성성에 대한 구조적인 결여로서 제시되어 온 것이고, 서구에서 여성성을 드러내는 담론 자체는 기존의 남성성에 비추어서 구분된 성적 차이의 구조를 재생산해 왔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여성이 자신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여성으로서 남성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신체(body)”를 사용하는 것 일 밖에 없다. 여성 작가에게서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과 그 여성으로 신체를 대상화하여 그 신체성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여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불가피한 것이다. 신체성을 초월한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결여로서의 여성성의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기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경심은 배제(foreclosure)된 여성성이라는 자폐적 공간 속에서 하나의 개인으로서 여성, 주체로서 여성의 발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학적으로 뒤틀릴 수밖에 없는 노력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의 신체를 칼로 난자하고, 생리혈로 온 몸을 뒤덮으면서 결여된 구조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여성성을 끊어 내고 스스로를 주체로 구성하려는 처절한 자학적인 몸부림을 마주하며 남자인 나는 숙연해지고 스스로의 부여 받은 의심조차 없었던 내 남성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