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ramdom.place - 무작위적 기억들의 장소

우리들은 놀랄 만한 일을 겪거나 보고도 못 믿을 경이적인 느낌을 받을 때면 ‘세상에’라고 감탄을 토해낸다. 세상, 우리 인간이 중심에 있는 장소를 이렇게 부른다. 대자연, 인공물, 도시, 사회, 사람 모두 잘 알려진 영역에 함께 속해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균형감과 안정감을 얻는다. 하지만 “잘 안다고 스스로 믿어버리는 것”의 오류는 사람이 바로 보는 시야를 가리고 지각을 마취시켜서 마치 사물과 인식 사이의 빈 틈을 메우는 확실성을 터득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거칠게 빌리자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언어를 통해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세상의 정보와 지식의 총합을 동원해 묘사, 또는 모사한다 해도 그것의 실재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남는다. 따라서 한지석은 판단의 제시가 아니라 그의 예술을 통해 단지 “보여줄 뿐”이다.

보이지 않는 대상을 마주하며, 중앙에서 작가의 최초의 붓질이 시작된다. 팽팽한 긴장감 속의 한 획을 시작으로 연주하듯 두드리고 튕기며 캔버스를 붓 한 자루로 가로질러 나아가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흘러내려 사라지는 이미지의 사이로 언뜻 사람의 웅크린 모습이 지나간 듯 하고, 어느 순간에서는 무엇인가 산산이 부서지는 장면을 본 것도 같다. 마치 낙서를 연상시키는 추상표현주의의 2세대 회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9~2011)의 회화는 서사적이고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구체적인 이미지 없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식별하기 힘든 기호들과 글자, 선묘들이 장난스럽게 뒤섞여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단일하고 분명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경험을 준다. 붓을 사용한 전통적인 채색방법 대신 유백색 또는 검은 캔버스에 물감을 묻힌 손가락과 손바닥을 사용하거나 연필과 크레용을 이용하여 즉흥적인 손의 움직임을 전달하는 그의 자유로운 드로잉 방식은, 현재에 집중하는 서사와 다양한 미디어에 표출되는 이미지를 유사한 선묘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한지석과의 계통적 상관성을 짚어보게 하는 좋은 사례이다. 다중적 이미지를 거듭하여 화면에 엷게 기록하는 그의 회화 작업은 인상적인 사건과 메시지들을 집적하여 용광로 같은 화면에 녹이고 융합시키고 켜켜이 기록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겹쳐진 얼룩으로 뒤덮인 화면을 마주 대하는 관객들에게는 당혹스런 경험을 준다.

미디어에 보도되는 기사들은 온통 세상을 사건, 사고, 문제투성이로 비춘다. 그렇게 비춰진 세상의 조각들을 한데 모우면 이미지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한가지 흥미로운 답을 우리는 한지석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이미지를 암호로 코딩 하듯이 한지석의 작품은 시각이 미처 형태를 제대로 인지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이미지의 타래처럼 얽혀있다. 그는 실제 일어난 사건이나 사실을 선택해서 주관적인 해석을 덧붙여서 추상적인 구성으로 화면에 엮어 넣는다. 따라서 그에게는 뉴스를 전하는 신문에서 차용한 기사 내용이나 보도 사진은 중요한 작품의 소재이자 스스로와 세상이 연결되는 접점들로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전 작업등에서 보이듯이 그가 자의적으로 선택한 눈에 띄지 않고 창문의 빗물처럼 화면에 줄줄 흘러내리는 모호한 이미지들이 작은 부분을 이루고 이것들의 조합은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얽히어, 전체적으로 보면 누군가와 닮은 얼굴을 연상할 수 있거나 신비로운 숲, 또는 강과 같은 정경, 혹은 의외로 어떤 사물들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억을 메모하는 듯 재구축한 이 이미지들이 결국 그 시점에서 작가가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이자 관계 맺음에 대한 고민의 대상으로 파악한다면, 전체의 형상은 작가의 다양한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정된 해석을 거부하는 그의 다중 이미지의 그림은 우리의 의식을 여러 방향에서 건드리고 있는데,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 실제와 환상, 현실과 이상, 그리고 마침내 서로 섞일 수 없는 종교와 문화에 이르기 까지 두루 뻗어간다. 하나의 작품을 보는 이들의 각자 경험과 기억에 따라 이미지들의 연결과 해석은 무한하게 조합되고 작품의 이미지를 달리 경험하게 한다. 배경과 복잡하게 연결되면서도 상층의 레이어로 오롯이 떠오르는 이미지의 고리들은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선택한 소통의 길로서 자기로부터 출발한 미로들이 역설적으로 소외와 단절이라는 외부의 어지러운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막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체적으로 그의 작품은 세부의 공간마다 반투명한 레이어들이 겹쳐지거나 서로 혼합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전체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의 결합 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층 구조의 그물 공간은 심리적 공간과 기억의 공간, 관계에 의한 사회적 공간, 개인을 둘러싼 정치적 공간들이 패치(patch)되고, 개별요소들을 꿰뚫는 가로 세로의 축을 이루며 유기적으로 전체 형태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과사전식 정보의 방대한 축적의 결과 엔트로피가 비가역적으로 증가하며, 어마어마한 이미지의 더미들은 빙하가 자기 무게의 압력에 의해 그러하듯 아래로 녹아 내린다. 감성이라는 과즙을 짜낸 후 남은 섬유질의 찌꺼기 같은 메시지와 이미지의 과잉 소비는 전기적인 자극으로 무작위적으로 접속해서 수백만 번을 다시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해내는 휘발성 메모리의 메타포이다.

최흥철(미술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