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위에 주사위를 던지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냈지만, 다시 인간의 욕망을 규정짓곤 하는 기호들을 조합함으로서 과잉 욕망으로 비틀린 사회를 풍자해왔던 위영일은 이번 전시에서 미술사라는 풍부한 기호의 장에 놀이판을 폈다. 새로운 양식의 격전지라고 할 수 있는 미술사와의 게임 원칙은 주사위 던지기이다. 이전 작업의 한 갈래였던 만화 캐릭터의 조합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변수를 다루기 때문에, 상상력에 기대기보다는 주사위 던지기라는 기계적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그 조합이 낳을 수 있는 결과는 거의 무한대로, 작가가 나머지 여생동안 이 원칙만 그대로 고수해 작업을 밀고나간다 해도 이 시리즈의 끝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이 시스템으로 나올 수 있는 작품 수는 4만개가 넘기 때문이다. 2009년에 처음 착상되었지만, 이번 전시에서 시도되는 ‘설정성 회화(aleatorik painting)’에 대한 작가의 정의는, ‘미술사를 토대로 미리 설정되는 매뉴얼에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경우의 수에 따라 작업을 진행하는 회화’를 말한다. 결과는 전시부제 ‘who knows?!’대로, 예측하기 힘들다.
‘주제-프레임-스타일-배경-중간 레이어-탑 레이어’로 등으로 나뉜 수평적 항목들 아래 6개의 선택사항을 6번의 주사위 던지기가 결정하는 것이다. 연속적인 6번의 주사위 던지기가 하나의 작품을 결정짓는다. 전시 장소의 한계 때문에 작품의 중요 요소 중의 하나인 사이즈는 제외된 6개의 항목 중에서, 스타일(사실주의-인상주의-표현주의-추상-뉴페인팅-팝아트)이라는 변수가 가장 복잡하다. 스타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격하게 규정된 닫힌 체계를 열린 체계로, 코드를 탈 코드화시킬 수 있는 요소이다. 전시장에 제시된 대로 제작 원칙은 누구나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산물은 불투명하다. 내용과 형식이 복잡하게 조합된 작품의 면면은 괴물의 추상화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기네스-욕망’전(2012년, 카이스 갤러리)에 보여주었던 입체 작품 [쓸모없는 것을 증명하는데 쓸모 있는 것]의 회화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그 작품은 ‘예술이란 늘 미래적 형태여야 한다’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낯선 재료’를 사용하여 ‘다각도로 표현’한 정체불명의 사물이다. ‘기네스-욕망’전은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높이 등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신기록에 대한 욕망이 부조리한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준다. ‘기네스적인 욕망’은 ‘기록을 위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생산을 위한 생산’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동어반복적인 그것들은 체계, 형식, 동일성에 갇혀있는 자기 지시성의 논리가 낳은 부조리한 결과들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전시에는 한 작가의 작품을 의심케 하는 정체불명의 평면 7점을 걸어 놓았다. 어쨌든 작가로서는 그가 선택한 방식을 통해서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있다. 직접 만든 변형 캔버스에 조합된 요소들이 깔끔하게 안치되어 있는 작품들은 나름의 심미적 대상이 된다. 최종 산물은 일종의 회화지만, 결과보다는 개념적 과정이 더 중요하다. 미술계에는 조수를 쓰는 작품들도 많지만, 이번 전시에서 주사위를 던지고 그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는 이는 철저히 작가 본인으로 설정된다. 주사위 던지기를 기록하는 비디오 버튼은 입회한 제 3자가 누르고, 이러한 엄격한 과정이 작품의 원본성을 보증한다. 그래서 이 작업은 주사위를 던지기를 기록한 비디오와 그 결과물 한 세트가 작품이다. 이 둘이 같이 있어야만 진품으로 인정된다. 숫자의 조합으로 대신한 작품 제목만큼이나 작가의 개성은 익명적이다. 그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예술작품을 특징짓는 ‘독특한 개성의 표현’ 따위는 아니지만, 작품이 가져야할 요건은 갖춘다. 그것은 작가가 정한 시스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변수와 (재)해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 뿐 아니라 세상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인간은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런 차이들에 의해 갈등도 생기지만, 변화도 가능하다.
시스템의 수용 뿐 아니라, 시스템의 생성에도 시스템 이외의 요소들이 작용한다. 모더니즘은 거의 수학자에 버금가게 형식주의를 강조하곤 했지만, 논리학자 괴델이 불완전성의 원리에서 증명했듯이, 한 형식체계가 얻고자하는 완전성(무모순성)은 그 자체의 형식 내에서는 증명 불가능하다. 시스템은 불완전한 것이다. 인간이 불완전하기에 시스템을 필요로 할 뿐이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성만큼이나 욕망이 작용한다. 아니, 이성 자체가 욕망의 한 지류일지로 모른다. 위영일의 작품은 질서정연함 이면의 무질서, 이성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패러디로 가득한 파타피직스(pataphysics), 동일자를 이루는 타자, 창조를 무색하게 하는 (재)발견이 강조된다. 그래서 작업의 엄격한 방식은 놀이와 해방의 과정에 열려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규정되는 방식에 대한 풍자가 포함된다. 가령 그는 한 가지에 익숙해질 틈 없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해 왔지만, 아직도 위영일 하면 ‘짬뽕맨’이 먼저 떠오른다.
헐크, 슈퍼맨, 플래쉬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원더우먼 등 여섯 가지나 되는 캐릭터를 절묘하게 조합하여 또 다른 괴물을 만든 그 작업도 디자인 전공-유명 만화가의 문하생-미대 출신이라는 복잡한 경력이 결집된 산물이지만, 코드를 조합하여 탈코드화 시키려는 그의 의지는 다시 코드화(재영토화) 된 것이다. 작가를 하나의 코드로 기표화 하려는 권력에의 의지에 대항하여, 잡힐 만하면 도망간다. 이러한 전략은 특정 코드가 한 작가의 브랜드를 결정짓는 시장의 흐름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다루는 미술사 역시 작가를 범주화하려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한 작가를 철저히 연구하면 할수록 어느 사조에도 끼워 맞출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런 작가로 피카소와 고야의 예를 들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한 항목으로 코드화되는 것은 작가 탓도 크다. 작가가 주제에 따라 매체를 매번 새롭게 결정하는 것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변화할 용기나 능력이 없어서, 또는 시장에 부응하기 위해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쏠림현상이 심하면서도 좀처럼 예술에는 기회를 주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한 우물 파기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 우물파기를 통해 가능한 숙련이란 장인의 가치이지, 예술가의 가치는 아니다. 위영일이 작가로 활동하기 전에 통과한 이력들을 보면, 한 가지만 열심히 파는 일에 대한 그의 거부감을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스스로 만든 판에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작품을 제작했지만, 자기 정체성과 색깔을 최대한 비우고 지운다. 그것은 위영일 특유의 ‘중구난방 스타일’의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그 어느 때 보다도 작가의 신화에 대한 거부감을 강하게 피력한다. 우연이나 무작위는 한 작가의 개성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될 수도 있지만, 위영일의 경우에는 작가를 지우는 용도로 전용된다. 이러한 역설은 그의 작업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에게 분류는 분류를 거부하기 위한, 있음은 되기를 위한, 정주는 탈주를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 내지 전제조건에 불과하다.
필연과 우연을 결합시키는 주사위 놀이는 다차원적인 역설을 위한 장치이다. 그의 작품에서 우연적 결과가 나오기 위한 장치는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다. 그것은 게임이 게임으로서 성립하기 위한 요건이다. 놀이는 일상과는 다른 한정된 시공간을 필요로 하며 정해진 규칙을 따라 진행된다. 이를테면 바둑은 바둑판에서 씨름은 모래판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캔버스 위에 주사위를 던진다. 물론 캔버스 형태도 주사위로 결정된다. 놀이는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정해진 한계와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놀이의 진정한 매력은 폐쇄적인 총체라는 조건이 아니라, 매번 원점에서 새롭게 시작된다는 점에 있다. 우리의 꼬인 인생과 달리, 놀이와 예술에는 새롭게 출발하는 자유가 있다. 전시장에 작품과 함께 설치된 육각형으로 만들어진 주사위 놀이판은 일련의 규칙에 따르는 소우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놀이가 펼쳐지는 특수한 시공간을 강조한다.
이번 전시의 놀이규칙은 타인이 주사위를 던져서도 안 되고, 반드시 6번을 연속적으로 던져야 한다. 규칙의 준수는 필수적이다. 놀이의 인류학적 의미를 서술한 카이유와의 [인간과 성(聖)]은 속임수를 쓰는 자보다 더 나쁜 자는 규칙을 거부하고 게임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멸시하는 자라고 한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 파괴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인류의 진보는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균등을 향한다. 예술가는 자신 뿐 아니라 타인도 참여할 수 있는 게임 원칙을 고안하고, 그 안에서 신나게 놀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자라는 점에서, 노동/소비라는 이원적 체계에 저당 잡혀 있는 대중들보다 자유롭다. 작가가 고안된 장치 속에서 놀지 못하고 붙잡혀 있다면, 그 또한 보통 사람들처럼 소외된 존재에 불과하다. 미술계, 특히 미술시장에는 놀이를 노동으로 격하시킨 작업들이 종종 발견된다. 그것들은 대개 자본주의적 분업시스템에 충실하다. 반대로 노동은 놀이로 고양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예를 ‘생활의 달인’ 같은 기이한 부류에서 발견한다.
카이유와가 분류한 네 가지 놀이방식—경쟁(Agon), 우연(Alea), 가장(Mimicry), 현기증(Ilinx)--중에서, 위영일이 선택한 것은 우연이다. [인간과 성]에 의하면, 알레아란 라틴어로 주사위 놀이를 의미한다. 그것은 우연적인 운명의 판결에 따르는 것이며, 우연의 자의성 자체가 놀이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놀이 방식은 상호간에 조합되거나 교차될 수 있는데, 새로움이라는 경쟁적 가치를 위해 만들어진 각종 미술사의 코드들을 우연적으로 선택하는 위영일의 작품은 독특한(유일한) 작품을 가장하며, 조합의 복잡성에 따른 현기증도 자아내는 것이다. 이전의 짬뽕맨은 가장과 현기증이 결합된 경우이다. 주사위 던지기는 필연의 재현이 아니라, 우연의 생성을 중시하는 현대철학에서 주목받는다. 질 들뢰즈는 [니체, 철학의 주사위]에서 주사위놀이라는 관점으로 니체의 철학을 다시 읽는다. 그에 의하면 니체는 우연을 다수성, 단편들, 부분들, 혼란과 동일시한다. 모든 사물들에게 우연을 돌려준 니체는 우연을 긍정으로 변화시킨다. 우연을 긍정하는 법을 아는 것은 놀이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통계학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연도 많이 집적되면 인과성과 개연성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바람직하게 바라보는 어떤 조합을 만들어내기 위한 어떤 목표가 생길 수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우연을 인과성과 궁극성의 손아귀 속에 붙잡아 없애는 것, 우연을 긍정하기 보다는 던짐의 반복을 계산하는 것, 필연을 긍정하는 대신 결과를 기다리는 것, 이러한 것들은 모두 나쁜 놀이꾼들의 행위이다. 그들은 이성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이다. 가령 과학과 경제 등, 지배의 기술에 통계학을 적용시키는 경우가 그렇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에서 과학자나 경제학자는 겉으로는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규칙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통계학적 방법으로 미시적인 혼동에서 질서를 밝혀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자본주의 시장이 움직이는 보편적인 통계적 특징을 분석함으로서 어떤 규칙성을 밝히고, 시장의 변동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이론은 개발하는 것은 경제학자의 꿈이다. 그들은 시장의 불확실성 속에서 투자 계획을 최적화하는 방법을 궁리 한다. 우연은 법칙화 되어 다시 결정론의 그물에 갇히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며, 통계에 대한 해석 역시 정치적인 것이다.
만사를 통계법칙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가령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변이의 원동력이 우연과 무작위성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곧 그 후계자들에 의해 인간, 사회, 역사의 발전 법칙 등으로 왜곡되었다. 역사는 어떤 궁극의 목적을 향한 진보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하는 부류가 끼친, 선한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악한 결과를 낳은 예로 넘쳐난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영웅들로 뭉쳐진 짬뽕맨은 거대서사의 주인공의 희화화된 모습이다. 근대 미술사 역시 평면을 향한 진보의 필연성을 발견하기 위해 분류될 수 없는 작가들을 일렬로 배열하곤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복귀된 우연은 필연에 대한 해독제로 다가온다. 그러나 들뢰즈는 니체를 따라 우주가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것, 그것은 그것이 알려지게 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희망할 만한 아무런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이 잘 놀기 위해 필요한 확실성이다. 주사위 던지기는 우연이 한 번의 던짐 속에서 충분히 긍정되지 못하면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진정한 놀이꾼 주사위를 너무 많이 던지지 않는다. 수많은 던짐을 계산하지 않는다. 훌륭한 놀이꾼은 인과성, 개연성, 궁극성 보다는 우연과 필연, 그리고 운명의 관계를 중시한다. 주사위 던지기는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의 다수성을 긍정한다. 이를 통해 세계는 미적으로 정당화된다. 니체는 실존에 대한 미적 정당화에 대해서 ‘우리는 예술가 안에서 필연과 제멋대로의 놀이, 그리고 대립적 긴장과 조화가 어떻게 예술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짝이 되어야 하는지를 본다’고 말한다. 주사위던지기는 그 자신의 차이를 즐기고 놀이하는 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여기에서 파생되는 다수성은 하나와 다른 하나의 차이이고, 생성은 자기와는 다른 차이이며, 우연은 모든 것들 사이에서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의 철학에서 차이란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읽는다. 즉 다수성, 생성, 우연은 그것들만으로도 기쁨의 충분한 대상이다. 대립의 노동, 혹은 부정적인 것의 고통 대신에 우리는 차이의 호전적인 놀이, 긍정과 파괴의 기쁨을 갖는다. 차이의 놀이는 다수성의 진리, 진정한 다원주의(pluralism)를 향한다. 모든 사물은 선험적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힘과 관련된다. 자아조차도 해석의 산물이다. ‘개인은 비개인적인 존재, 개인보다 우월한 존재로 변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니체는 자아가 사고의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사고의 결과라고 말한다. 자아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근대의 주체 중심적 이성을 부정한다. 우연에 의해 결정된 요소들이 경합을 벌이는 위영일의 작품은 해석을 중시한다. 본질로부터 해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질자체가 해석의 결과이다. 들뢰즈의 니체 독법에 의하면,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점유할 수 있는 힘들 만큼 많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 사물 자체는 중립적이지 않으며, 현재 자신을 점유하는 힘과 근친성을 가진다. 본질은 한 사물의 모든 의미 가운데서 그 사물이 최고로 친근하게 되고자 하는 힘을 그 사물에 부여하는 것이다.
대상 자체는 힘, 즉 하나의 힘의 표현이다. 많은 힘들이 중층 결정된 위영일의 작품 역시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세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위영일은 ‘우리가 예술을 본다는 것은 현실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에 의해 자의적으로 설정된 세계를 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권력에의 의지에 의한 해석이라는 주장은 막연한 자의성 보다는 예술의 자유에 방점이 찍혀있다. 주사위놀이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우연과 필연을 결합시킨다. 마르트 로베르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에서, 소설이란 바로 소설이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있거나 부과하게 될 의무를 제외하고는 어떤 정해진 의무를 지니지 않는다는 특수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미술에도 해당된다. 즉 예술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말하는 자유 덕택으로 진실이라는 것’(마르트 로베르), 그리고 예술은 자신이 선택한 게임 원칙에서만 책임을 진다는 점이다. 위영일이 이번 전시에서 엄격하게 적용한 우연 놀이는 자유를 향해 열려있다.


이선영(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