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한가운데에서


갤러리 비원에서 열리는 권대훈의 ‘Willowwacks’(무인삼림지대)는 사유의 공간이 등장한다. 바닥에 던져진 캔버스위에서 벌떡 일어난 듯한 자소상은 창가에서 무엇인가 응시한다. 응시는 무언가 재현된 것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실재가 드러나는 장을 향해 있다.   전시장 전면이 거대한 창이기에 말 그대로 창가에 서 있지만, 작품 속의 창은 실재하지 않고, 참조대상의 색상과 명암을 따라 칠해진 자소상과 그것이 서있는 캔버스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을 통해 암시될 뿐이다.  입구도 출구도 없으니, ‘무인삼림지대’라는 부제처럼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나올 수도 없다.  그곳은 다만 사유를 통해서 출입이 가능한 사유의 공간이다. 언어 또는 상징적 우주 속에 존재하는 그는 창살 없는 감옥 속에 유폐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상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캔버스는 통상적인 그림처럼 환영이 고정되는 장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현실의 모사가 아니라, 현실에 도입된 새로운 대상을 향한 근대미술의 여정을 압축한다.
회화적 대상으로서의 평면 위에 선 이의 사유 모델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예술이다. 자소상에 드리워진 창틀 그림자는 그려진 것이지만, 캔버스에는 그 위에 서있거나 앉아있는 상의 실제 그림자도 드리워진다.  조각과 회화가 결합된 방식으로 인해, 서로 다른 차원의 현재적 순간을 증거 하는 그림자가 공존한다. 그가 위치하는 현실은 실제의 물리적 공간 대신에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현재로 가득 채워진다, 그것은 밝고 깊게 빛나는 충만한 현재의 순간에 붙박혀 있다. 캔버스 위에 시계바늘처럼 서있는 자소상은 해시계처럼 특정 시공간대를 예시한다.
권대훈의 작품에는 빛과 그림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는 동서고금에 존재하는 해시계를 통해 ‘일정한 시간은 그 시간에 유일한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동시에 ‘하나의 그림자의 모양은 하나의 순간(현재)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떤 공간적 형태는 유일한 하나의 순간을 예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동안 그의 작품의 실험 대상이었던 빛과 그림자는 깨달음으로의 여정을 이끌어왔다. 
그것은 미로 안에서의 방황일 수도 있고, 창가에서 사유에 잠긴 이처럼 제자리에서 떠나는 유목일 수도 있다. 순환은 미로 속에서의 방황을 의미하기도 하고 무한한 반복 속의 회귀를 의미하기도 한다. [무인삼림지대]에서 해시계처럼 바탕 면에 독특한 그림자를 떨구는 존재의 모습에는 영원히 회귀하는 시간의 루프 속에서 생성되는 차이가 있다. 꼬리를 무는 시간의 루프 속에서 본질과 가상, 존재와 생성을 대립으로 보는 이분법은 사라진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 속에 부침하는 권대훈의 작품에서 이원성(duality) 간의 역학관계는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 또는 둘, 또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가 둘이 되는 사건’(니체)이다. 가령, 캔버스 위에 서있는 인물은 환영과 실제라는 두 그림자를 드리운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니체 연구서 [정오의 그림자]에서, 이원성 즉, 실재의 분절화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세계는 서로를 반영하면서 그 어떤 구체적 실재도 결여하는 가상(semblance)들의 끝없는 반영—무한히 이어지는 표상들의 표상들—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가상이나 환영이 아니라, 현상이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니체가 ‘가장 짧은 그림자’라는 용어로 정식화한 ‘한낮’은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류의 천정’이라고 말한다. 한낮은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이다. 그리고 한 사물의 가장 짧은 그림자란, 이 사물자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건은 두 가지 시간태의 조우가 일어나는 순간을 말한다. 사건은 언제나 미래와 과거의 조우이며, 미래 뿐 아니라 과거에도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다. [무인삼림지대]에서 사건은 주체에게 일어난다. 주체는 사건을 위한 장소와 시간을 만드는 어떤 것의 이름이며, 또한 사건에 의해 개시된 어떤 것의 이름이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과 조우하면서 분열되는 순간이다. 사건은 두 주체를 분리하면서 연결하는 어떤 것이다. 니체에게 예술가의 면모를 띄는 창조적 인물 초인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고 불리는 계기에서 일치하는 이 ‘영원의 우물’에 빛을 비추는 눈을 가진 자이다. 그는 영원 회귀하는 ‘한낮의 심연’으로 일순간 빛을 던진다.


 이선영(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