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切唯心造 - 바로 네 마음이 보고 싶은 모든 꼴을 만든 거야

해골과 원효대사의 깨달음에 대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본디 화엄경 유심계에 나오는 지옥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읊는 계송으로서 불교의 선 사상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일체의 법은 인식하는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며 모든 존재의 본체는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생기는 그 마음까지 버려야 하는 도리를 말한다. 종교 성향을 떠나 일반적으로는 극기의 의지를 불태우는 이들이 종종 이 말을 일상의 좌우명으로 삼기도 한다. 그런데 작가 권대훈이 오늘 우리에게 이 화두를 불쑥 던진다. 아주 쉬운 말 같다가도 고쳐 생각해보니 무게감이 결코 만만치 않다. 본다는 것이란 안구 망막을 거쳐 시신경에 도달한 빛을 처리한 일종의 신호를 소뇌의 시각겉질에 영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 먹기에 달렸다니, 물질기반 위에 화려하게 펼쳐진 코 앞의 조형 공간의 세계가 엄정한데 대체 이 무슨 도발인가? 그렇다면 이 간결한 선언은 그가 떠나온 세계로부터 거슬러서 탈 물질의 세계로 이행하기까지 고단했던 그의 마음의 행로를 담아 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가 현존하는 시간과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근대 이후 자연 과학의 발견을 통해 200가지가 넘는 기본 원소를 발견하고 분리해 내기 이전까지는 ‘물’, ‘불,’ ‘공기’, ‘흙’으로 세상 만물의 물질들이 만들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와 상관 관계론이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특히 그는 건습온냉의 4가지 기운의 배합 정도에 따라 한 원소가 다른 원소를 변하게 하거나 다른 원소로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아주 멀리 떨어진 티벳에서도 유사한 원소 개념을 찾을 수 있는데, 단지 4가지 원소에 ‘허공’이 하나 더 보태어 진다는 점이 특색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오행이라고도 하는 ‘불’, ‘물’, ‘나무’, ‘쇠’, ‘흙’을 세상 만물의 물질적 토대로 여겼다. 오늘날에는 과학적인 물리 법칙으로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한 가지로 결코 받아들여질 수는 없으나 상상계를 이루는 사유 구조의 근간으로는 매우 유효하다. 빛과 그림자를 재료로 사용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내며, 변화의 차이를 통해 시간을 탐구하는 작가 권대훈 역시 물질의 상태는 그것에 관여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한다는 인식론의 극단적인 한계로부터 오히려 창작론의 새로운 단초를 발견하고 고도의 허무를 넘어서고자 시도한다.

이 모습은 토마스 사무엘 쿤 (Thomas Samuel Kuhn, 1922 - 1996)의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새로운 이론들이 새 패러다임 안에서 개념들의 의미를 바꾸면서 낡은 이론들과 통합하는 것을 보여준 인식론적 단절(coupure 또는 rupture épistémologique)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과학철학자이자 상상력의 대가인 바슐라르는 일상 감각이나 의식의 심층에 깃든 과학적 인식에 대한 장애를 드러내고, 과학과는 다른 축에서 작용하는 상상력을 고찰함으로써 이성과 몽상이 합쳐진 존재로 인간을 파악하였다. 따라서 과학과 시, 합리성과 꿈이라는 두 방향은 과학적 인식과 꿈이 서로 엮이며 역동적인 상상력을 발전시킨다.

우리와 유사한 문화권인 일본의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모노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놓아둠으로써 사물, 공간, 위치, 상황, 관계 등에 접근하는 예술이다. 인간에 의해 조작된 사물 혹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저버리고 사물 고유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실존을 드러낸다. 하지만 물질의 상상력에 대하여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이란 책에서 "근심에서, 생각에서 해방된 사람은 더 이상 그의 무게 속에 갇혀 있지 않다"고 말한 까닭을 권대훈은 그저 예술가로서 실험하고 있을 뿐이다.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스위치로 불을 켜는 전등으로 인해 살아 있는 램프의 몽상을 빼앗겼으며 '통제되고 관리되는 빛의 시대'가 열렸다고 이야기하지만 권대훈은 전등의 기계적인 권력을 벗어나 상상력을 부활시키고 있다.

어느 날 어두워진 숲 속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 속에 헤매던 경험에서 시작한 시리즈 작업
<숲에서 길을 잃다 Lost in the Forest> (2009)는 흰 벽에 성냥개비 끝 만한 작은 돌기들이 무수히 박혀있는 작품이다. 어둠과 희미한 빛과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혼란스러움을 더하는 가운데 과연 그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굳이 인지심리학의 쉬프트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도 얼룩이나 무늬에 특별한 의미와 형상을 부여하게 되는 경험이 종종 있다. 곧 소거된 이미지는 뇌리에는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그야 말로 그것은 마음에 드리운 그림자의 형상이다. (2007)이후 그의 빛을 조영해 그림자의 허상을 순간순간 보여준 전작들은 그의 아주 짧지만 무엇보다도 극적이었을 경험의 시간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서 고심한 실험의 끝에 나온 시각적 발견 중 하나라고 하겠다. 그는 카타르시스의 상태로 나아가는 극적인 진행, 또는 극단적인 변화, 자연 상태를 모방하고 자기가 본 듯한 것들의 느낌을 전해주고자 한다.

누구나 꿈인 것을 알지만 이대로 깨지 않기를 바란 적이 있다. 혹은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의식이 살아있다면 ‘이건 꿈이야’하고 인식하며 제발 벗어나기를 간절히 애원한다. 불안한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에 놀라게 되고 그 놀람이 재차 공포로 진화해 나감을 겪지만 그 자체가 아주 짧은 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의 한 마디일 뿐이다. 행복감이 엷어질 수록 이미지는 점차 추상적으로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공포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지와 서로 고정된 짝을 이루어 점차 구체적으로 강화되고 또렷해진다. 권대훈의 작품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불안함과 맞닿아있으며 바로 그의 작품에 팽팽하게 내재된 긴장감과 연결된다.

첫 개인전에서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원목에 가까운 나무에 철제 바이스로 강한 압력을 가해서 굴절시키는 상황을 통해 물질이 자아내는 엄청난 긴장에 주목하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저 힘만으로는 부러뜨릴지언정 구부리기는 불가능해 보이는 두툼한 통나무들에 각종 투박한 철제 공구들을 물리고 온도와 습도를 주의 깊게 고려하면서 아주 천천히 조여가는 과정이 한 순간이 그가 세상에 보여준 작업임을 회고해 보면, 지난 10여 년간 물질을 이용해 역으로 드러내는 비물질성, 특히 그 중에서도 고정된 형태에 시간성을 담는다는 일관된 개념을 추구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뜻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의 최초 시도는 영국 체류 이후 빛과 그림자 등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기 위한 기반이 되었다.

이번에 갤러리 비원의 공간에서 전시될 작업들은 이전 일련의 그림자의 변화를 이용한 라이팅 설치의 흐름을 이어주는 (2010) 시리즈와 숲과 일상 중의 사람이 함께 겹친 드로잉 몇 점, 그리고 처음 선보이는 그림자를 입힌 페인팅 조각이다. 빛의 방향 혹 그림자의 방향이 바뀜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인식의 변화이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는 바로 지금 이 시간을 함께 보여준다는 점이 이번에 시도한 조각에 다른 색의 그림자를 칠한 작품으로 보다 분명해진다. 이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한 순간일수도 있는 평행하는 또 다른 시간과 지금 바로 여기라는 두 개의 순간을 나란히 보여주어 조각의 시간은 고정된 것이라는 고전적인 관념을 부정한다. 그래서 이 작은 남자상은 조각이면서도 페인팅이다. 반대로 그의 드로잉에는 전혀 음영이 없고 그 대상이 가진 형태만이 그려지는데, 그건 반대로 시간의 항구성이라는 면에서 상당히 조각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는 숲에서 나오니 그곳이 다시 그립고, 지금은 또 다른 사람의 숲에 둘러 쌓여있다고 말한다. 서서히 작가의 관심에 변화가 옮겨가고 있다. 그것이 권대훈이 태양 아래 보여지는 우리의 모습 등을 담으려 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늘 자기의 길을 되묻는 작가이다. 결국 그의 시간이란 삶의 매 순간으로 이어지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최흥철(독립기획자)